
심상찮은 영화 한 편이 나타났다. <새벽의 황당한 저주>의 주역들이 다시 뭉쳐 만든 <뜨거운 녀석들>은 범죄, 미스터리, 액션, 호러 등 갈지자로 장르를 횡단하며 잡탕영화의 진면목을 유감없이 발휘한다.
지난 2004년 4월 영국의 극장가는 예고도 없이 출현한 한 편의 영화로 발칵 뒤집혔더랬다. 그 정체는 워킹 타이틀 특유의 로맨스를 조지 로메로의 좀비영화로 패러디한 <새벽의 황당한 저주>였다. 눈알을 희번덕대는 좀비가 등장하지만 무섭기는커녕 웃음이 실실 배어나오는가 하면, 애절한 남녀의 사랑을 로맨틱하게 다루기는커녕 핏빛 영롱한 사지절단으로 난도질하는 영화. ‘초특급패러디러브로망완전코믹호러물’ <새벽의 황당한 저주> 앞에서 많은 이들은 일치단결 ‘와우!’를 외쳤다.
그로부터 3년, 이 황당한 음모를 모의한 용사들이 뭉쳤다. <새벽의 황당한 저주>의 감독 에드가 라이트, 숀과 그의 단짝친구 에드로 각각 출연했던 사이먼 페그와 닉 프로스트가 다시 한 번 손잡은 것이다. <뜨거운 녀석들>이라는 죽이는 영화로 그들이 컴백했다. 이 황당한 녀석들은, 마이클 베이의 <나쁜 녀석들> 시리즈를 패러디한 제목과 포스터처럼 전작에 이어 열과 성을 다해 다시 한 번 '골 때리는' 이야기를 들려준다.
에드가 라이트, 네 멋대로 해라
니콜라스 엔젤(사이먼 페그)은 영국에서 가장 잘나가는 런던 경시청의 천하무적 경찰. 남보다 한 발 앞서 범죄 냄새를 맡는 동물적인 감각, 한 번 물면 절대 놓지 않는 검거 능력은 동료경찰들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다. 어느 날, 승승장구하던 그에게 날벼락 같은 좌천 명령이 떨어진다. 너무 잘나 꼴 보기 싫으니 런던에서 멀찍이 떨어진 지방 소도시 샌포드로 내려가라는 것. 범죄율 0%를 자랑하는 시골마을에서 니콜라스를 맞이하는 건 루저가 더 어울리는 경찰, 대니 버터맨(닉 프로스트)이다. 전세계 모든 범죄영화를 섭렵했지만 실제 검거 경험은 아주 없는 대니와 니콜라스가 하는 일이라곤 마을축제 안전관리와 실종된 백조 수색이 전부. 그런데 놀랍게도 엽기적인 사건이 꼬리에 꼬리를 물며 니콜라스는 바빠지기 시작한다. 대니와 함께 불철주야 동분서주하던 중 그는 평화로워 보이는 이 마을에 엄청난 비밀이 숨겨져 있음을 눈치 채게 된다.
범죄영화를 떠올리게 하는 <뜨거운 녀석들>은 단순한 범죄물이 아니다. 범죄물의 시작처럼 문을 열지만 미스터리로 바뀌었다가 코미디로 선회한 뒤, 호러와 액션을 종횡무진 하는 종잡을 수 없는 행보를 이어간다. 이런 걷잡을 수 없는 무정형성은 <새벽의 황당한 저주>에서 <뜨거운 녀석들>까지 에드가 라이트 영화의 진면목이다. 한 장르에 구애받지 않고 마음 내키는 대로 구성하는 이야기. 에드가 라이트가 <뜨거운 녀석들>을 통해 재현하려는 것은 과거 자신이 열광하고 환호했던 범죄 액션영화들이다. 그런데 꼭꼭 숨겨두고 자기만 아는 영화를 취하지 않고 <나쁜 녀석들>(1995), <다이 하드>(1988), <폭풍 속으로>(1991)처럼 우리 모두에게 익숙한 영화들을 버무린다. 이들 영화를 장르 공식에 맞춰 취합하는 게 아니라 의도적으로 비틀어 전혀 새로운 영화로 창조한다는 점이다. 한 마디로 <뜨거운 녀석들>은 별종세계에서 만들어진 장르의 잡탕영화인 것이다.
그런 점에서 에드가 라이트의 영화는 쿠엔틴 타란티노의 영화와 닮았다. 이 분야에서 에드가 라이트의 선배격인 타란티노는 데뷔작부터 취향으로만으로 자신의 세계를 구축한 흔치않은 사례들을 남겼다. <저수지의 개들>(1992)은 임영동 감독의 <용호풍운>(1985)에서 그 설정을 빌려왔으며, <펄프픽션>(1994)은 가판대 싸구려 소설을 원전으로 삼았고, <킬빌>(2003)은 기억 속 B무비 컬렉션의 집대성이었다. 취향이 곧 영화로 재현되는 에드가 라이트 역시 마찬가지다. 미국 ‘버라이어티’ 지의 평론가 데릭 엘리는 “만약 쿠엔틴 타란티노가 영국인이었다면 그는 아마도 에드가 라이트였을 것”이라고 평가했을 정도다(타란티노의 <그라인드 하우스>에 등장하는 4편의 가짜 예고편 중 하나인 <돈 스크림>을 에드가 라이트가 연출했다). 그러니 타란티노 영화와 마찬가지로 에드가 라이트의 영화에서 심각한 의미를 찾으려는 건 쓸데없는 짓이다. 우린 그저 액션을 즐기면 되고, 참조한 영화들을 어떻게 요리했는가를 즐기면 그만인 것이다.
단, 방법이 흡사하다고 타란티노 영화와 에드가 라이트 영화가 같다고 오해하지는 말자. 그와 함께 각본을 쓴 니콜라스 역의 사이먼 페그는 이렇게 하소연한다. “우리의 영화는 독창적이다. 그런데 다른 영화를 참고해 만들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어 손해를 보는 경우가 종종 있다.” 물론 <새벽의 황당한 저주>도 그렇고, <뜨거운 녀석들> 역시 주로 할리우드영화를 패러디하고 있다. 하지만 그것은 단순 차용이 아닌 영국의 문화를 토대로 한 인용이요, 패러디다. 가령, <새벽의 황당한 저주>에서 좀비로 등장하는 이들의 모습은 IMF 이후 영국인들의 단조로운 삶을 풍자한 것에 다름 아니다. <뜨거운 녀석들>도 마찬가지다. 코믹 액션으로 포장된 그 속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영국사회의 보수주의에 진저리치는 심정이 반영돼 있다. 다시 말해 <뜨거운 녀석들>은 대중적인 장르를, 가장 개인적인 취향에 담아 연출한, 가장 영국적인 영화라 할 만하다.
아낌없이 비틀련다
가장 힘들었던 사람은 아무래도 각본과 연기를 병행한 사이먼 페그였다. 각본가로 오로지 새로운 액션영화를 만들겠다는 일념 하에 뛰어든 그지만 막상 배우로 촬영에 임할 때는 “이런, 오늘도 하루 종일 뛰어다녀야 하잖아. 도대체 이런 장면은 누가 쓴 거야? 정말 미치겠구먼”이란 소리가 절로 났다. 전작 <새벽의 황당한 저주>에서 사이먼 페그가 맡았던 숀은 실제 자신과 에드가 라이트를 섞어놓은 인물이었기에 연기하는 데 큰 어려움은 없었다. 그런데 에드가 라이트는 어쩐 일인지, 사이먼 페그가 맡을 니콜라스를 의도적으로 전작과 반대되는 성격의 인물로 만들어버렸다. “유머도 없고, 농담도 전혀 할 줄 모르는 역할을 연기하기 위해 사이먼이 진지한 인물로 완전히 변신한다는 사실이 그 캐릭터의 가장 웃긴 점이자 우리 영화의 가장 코믹한 요소였다.”
패러디와 함께 이 영화를 규정하는 핵심어는 ‘비틀기’다. <뜨거운 녀석들>을 제작한 회사는 워킹 타이틀. <노팅힐>(1999) <브리짓 존스의 일기>(2001) <러브 액츄얼리>(2003) 등 로맨스영화의 명가로 이름을 날린 바로 그 회사다. 그러니까 에드가 라이트와 사이먼 페그, 그리고 닉 프로스트 같은 악동들이 워킹 타이틀에서 영화를 만들었다는 자체가 일종의 비틀기였다. 이 황당 삼인방은 <새벽의 황당한 저주>를 통해 로맨스를 좀비영화로 기가 막히게 비튼 전력이 있다. <뜨거운 녀석들>도 마찬가지. 남자 경찰 두 명이 주인공으로 등장하지만 에드가 라이트와 사이먼 페그는 두 남자의 사랑이야기로 영화를 정의내렸다. 두 남자의 로맨스를 액션영화로 희화한 비틀기라 할 수 있다. 캐릭터부터 장르적 특성, 이야기까지 끊임없는 비틀기 속에 굴러가는 영화인 셈이다.
그중 티모시 달튼의 망가짐은 놀랍다 못해 경악스럽다. 티모시 달튼이 누군가. <007 리빙 데이라이트>(1987)와 <007 살인 면허>(1989), 단 두 편의 시리즈에 출연했지만 강인한 남성성과 정의의 기사도, 느끼하지만 우아한 신사도를 뽐내며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007을 연기했던 배우 아닌가. <뜨거운 녀석들>에서 그는 악역으로 등장한다. 그냥 악역도 아닌 비열하고, 치졸하고, 얄밉고, 구차하고, 두뇌회전도 그다지 빠르지 않은 지상 최악의 인물이다. 배우의 기존 이미지를 비튼 설정이 우습기도 하거니와 출발은 더욱 황당하다. 영화의 배경이 되는 마을에 등장하는 실제 슈퍼마켓 주인이 못생겨 에드가 라이트와 사이먼 페그는 그 반대되는 인물인 잘생긴 사람을 떠올렸고, 그게 바로 티모시 달튼이었다. 하긴 티모시 달튼뿐이랴, 대니 역의 닉 프로스트를 제외하곤 짐 브로드벤트도, 빌 나이도, 심지어 눈 깜짝할 사이에 등장했다 바람같이 사라지는 피터 잭슨도, <뜨거운 녀석들>에서 망가짐에 에누리는 없다.
의미심장한 건, 그런 비틀기가 영국사회를 반영한 이야기에서 나온다는 사실이다. 겉만 봐서는 패러디영화에 다름 아니지만 껍질을 벗겨보면 현재 영국사회가 처한 현실이 고스란히 반영돼 있다. 전통을 중시해 혁신을 이루지 못하고, 날로 높아가는 실업률, 외부인들의 유입에 대한 저항, 그로 인해 날로 노령화되고 보수화돼가는 영국. 이야기를 뜯어보면 내부인과 외부인, 전통과 개혁, 신구(新舊)의 대결 구도로 짜여 있다. 일례로, 젊은 연기자들이 셰익스피어 연극을 망쳤다고 마을의 노인들이 모여 성토하는 장면은 우스꽝스러워 보일지 모르지만 지금의 영국을 보여준다.
패러디하려면 이들처럼
에드가 라이트 감독은 소문난 액션영화 팬이다. 함께 각본작업을 한 사이먼 페그 역시 <리쎌 웨폰>(1987), <다이 하드> <폭풍 속으로> 같은 영화라면 아주 깜빡 죽는다. 특히 에드가 라이트에게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더티 해리> 시리즈는 ‘내 인생의 영화’라 할 만큼 큰 영향을 미쳤더랬다. 어찌나 좋아했던지, 1974년 생인 그가 열두 살 때부터 만들기 시작해 제작하는 데 6년이 걸린 습작용 액션영화 <데드 라이트>(1993)에는, <더티 해리>(1971)의 “운이 좋을 것 같나?(Do you feel lucky?)", <더티 해리 4: 써든 임팩트>(1983)의 “너희들 오늘 모두 끝장이다!(Go on make my day!)" 같은 유명 대사가 등장할 정도다. 그뿐 아니다. 오우삼 감독의 <첩혈속집>(1992), <저수지의 개들> 등 당시 좋아했던 액션영화의 흔적들이 곳곳에 심어져 있다. <뜨거운 녀석들>이 <데드 라이트>를 원형으로 해 만든 작품이니 이 영화 자체가 <데드 라이트>의 패러디에서 출발하는 셈이다.
<새벽의 저주> 한 편을 패러디 대상으로 삼았던 <새벽의 황당한 저주>와 달리 <뜨거운 녀석들>은 <나쁜 녀석들>과 <더티 해리>는 물론이고, 샘 페킨파의 <어둠의 표적>(1971), 오우삼의 <첩혈쌍웅>(1989), 캐서린 비글로우 감독의 <폭풍 속으로>, 심지어는 아가사 크리스티의 추리소설까지 그 범위와 대상이 무한정으로 걸쳐 있다. 매 장면이 인용이요, 영화 전체가 범죄와 액션영화에 대한 오마주인 것이다. 특히 사이먼 페그는 <뜨거운 녀석들>의 패러디가 척 노리스나 스티브 시걸이 나오는 액션영화처럼 과장된 줄거리 가운데서 의도하지 않은 재미를 주길 원했다. 그래서 패러디 대상으로 의도적으로 비장하고 심각한 영화와 장면만을 골라 정색한 얼굴을 한 채 코미디로 전락시킨다. 예를 들어, 세르지오 레오네의 <무법자> 시리즈 히로인인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갑빠와 낭만’을 벗겨내기 위해 <뜨거운 녀석들>은 이런 방식으로 ‘쌈마이’화한다. 최후의 대결을 앞둔 니콜라스가 자신의 경찰차를 놔둔 채 비장한 표정으로 21세기의 대로 위에서 말을 타고 등장해 웃음을 유도하는 것.
무엇보다 가장 눈길을 끄는 건 니콜라스와 대니의 관계다. 이들은 짝패가 등장하는 모든 액션영화가 그렇듯 처음엔 티격태격하는 모습으로 등장하지만 결국엔 서로를 위해 목숨을 내놓을 수 있을 정도로 끈끈한 관계가 된다. 하지만 감독은 심각한 분위기로 이를 묘사하는 데는 전혀 관심이 없다. 대신 그들의 관계를 동성애적으로 묘사해 묘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감독이 보기에 고전적 의미의 버디영화에서 가장 큰 재미를 주는 건 파트너 간의 동성애적인 관계이기 때문이다. <리쎌 웨폰>이 <뜨거운 녀석들>에서 이를 패러디할 가장 좋은 대상으로 사용된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로저(대니 글로버)가 마틴(멜 깁슨)을 양팔로 안고서 “내가 너를 잡았어!(I've got you!)"라고 말하는 장면은 에드가 라이트 감독이 생각하기에, 모든 영화를 통틀어, 게이 포르노까지 포함해서 가장 호모 에로틱한 장면이다. 남성 이성애자 간에 싹트는 사랑을 좋아한다는 그는 이와 같은 설정을 통해 영화의 긴장감을 불어넣고 궁극적으로 웃음을 유발하는 데 거리낌 없다.
이렇듯 <뜨거운 녀석들>의 패러디는 개인의 묘사에서부터 캐릭터 간의 관계, 그리고 사건에 이르기까지 일관된 패러디의 흐름 속에서 하나의 형태로 꿰어진다. 특정 장면을 패러디해 단순 나열하는 것이 아닌 캐릭터와 사건이 쌓아가는 이야기 속에 자연스럽게 녹여내는 것이다. 이미 존재하는 장면들로 구성된 영화지만 완성된 작품은 전혀 새로운 영화로 재탄생했다. “우리가 만들고 싶은 코미디영화는 <무서운 영화>처럼 가벼운 패러디가 아니었다. 다양한 장르를 접목해 전혀 새로운 유형의 코미디영화를 만들고 싶었다”는 에드가 라이트와 사이먼 페그의 바람대로 <뜨거운 녀석들>은, ‘이버트 & 로퍼’의 평론가 리처드 로퍼로부터 “<총알탄 사나이> 이후 매 장면 웃음을 선사하는 가장 재미있는 코미디영화”라는 극찬을 받는 등 영국과 미국에서 가장 뜨거운 영화로 등극했다.
‘이 영화를 보지 않는 건 범죄행위’ ‘너무 웃다가 옆구리 터져 나가는 영화’ ‘영화를 보고 웃지 않는다면 죽은 건 아닌지 확인해봐야 할 것’ 등, <뜨거운 녀석들>에 대한 찬사는 상상 그 이상이다. 이 폭발적인 반응들처럼 <뜨거운 녀석들>은 근래 나온 영화들 중 영화가 관객에게 줄 수 있는 아드레날린의 최대치를 구현한다. 이 불한당들의 막무가내 재담에 당신의 쾌감지수도 훌쩍 상승할 것이다.

필름2.0 339호
(2007. 6.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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