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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의 시대, 장르가 뜬다!

2007/12/10 15: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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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르는 최근 한국 대중문화의 가장 중요한 화두다. 최근 몇 년 사이에 불붙어 여기저기 감지되는 장르의 부상은 한국 대중문화 전반에 걸쳐 '장르 효과'를 일으키고 있을 정도다. 즐길 만한 장르물들을 일별하고 장르가 한국 대중문화에 미친 영향, 영화와 문학에서 뚜렷하게 감지되는 장르 효과의 징후를 읽는다.


한국에서 장르는 흔히 마니아의 전유물로 여겨진다. 양식이나 형(型)을 뜻하는 말 장르는, 영화나 문학에서 쓰일 때 비슷한 소재와 배경, 그리고 전개구조를 지닌 유사 이야기 형태를 의미한다. 공포, 스릴러, 판타지, SF(Science-Fiction) 등이 장르의 예. 장르가 굳건히 자리 잡은 미국, 일본과 달리 한국에서 비주류로 인식되던 장르가 주목받고 있다. 장르가 영화와 문학에서 없어서는 안 될 주요 콘텐츠로 자리 잡은 배경은 무엇일까?

제자리 찾아가는 장르

근년 간 대작영화 만들기에 몰두했던 한국영화계는 규모의 환상에서 탈피해 ‘장르’를 화두로 삼고 있다. 여름이면 찾아오는 ‘공포’는 제법 탄탄한 기반을 갖춘 장르이며, 올 들어선 스릴러(<리턴> <세븐데이즈> <우리 동네> 등), 시대극(<궁녀> <라듸오 데이즈> <모던 보이> 등), 서부극(<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 이하 <놈놈놈>) 등 새로운 장르 발굴에 전력을 쏟고 있다.

출판계는 일찍이 장르에 눈을 돌렸다. 1990년대 중후반 등장한 이우혁의 <퇴마록>, 이영도의 <드래곤 라자>의 폭발적인 인기에 힘입어 판타지소설 시장이 형성된 사례가 있다. ‘셜록 홈스’ ‘아르센 뤼팽’ 등을 앞세운 고전 추리소설이 2000년대 초반부터 붐을 이뤄 현재는 미스터리물이 출판시장의 효자 품목으로 자리를 굳혔다. 2007년 5월에는 ‘장르’를 전문적으로 다루는 문화지 ‘판타스틱’도 창간했다. 바야흐로 장르가 ‘문화담론’의 중심으로 자리를 이동한 셈이다.

영화든 문학이든 장르 형성의 방식엔 나름의 특징이 있다. 가령, 영화에서 장르는 하위 장르가 세분화돼 있을 만큼 장르 간의 이동이 자유로워 자기 정의가 가능하다. 그에 반해 문학은 스릴러, 공포, SF, 판타지를 제외하면 딱히 장르라고 정의 내릴 수 있는 실체가 없어 상위 개념만 존재한다. 그렇다고 영화에서 장르가 폭 넓게 수용되는 것은 아니다. 장르가 여러 갈래로 잘게 나눠져 팬층이 분산된 까닭에 B급 문화 정도로 취급 받는 것이 현실이었다. 문학에서 장르가 독자층은 존재하지만 변변한 비평이 없어 마니아들만 즐기는 소수문화로 인식됐던 것처럼, 영화에서도 그저 일시적 유행처럼 받아들여진다.

그런 점에서 최근 장르 붐은 장르가 주류문화로 자리 잡은 징후라기보다 진행 중인 현상으로 이해하는 것이 옳다. 장르는 태생적으로 마니아 문화를 건드릴 수밖에 없어서 수요에는 한계가 있고 파급효과 역시 주류문화에 비할 바가 아닌 것이다. 다만 장르가 척박한 한국 대중문화의 토양 위에서 다양성 확보에 기여한다는 사실을 눈여겨봐야 한다.

출판사 ‘황금가지’의 이지연 편집주간은 “장르문학이 주류문학을 대신할 정도로 크게 주목받고 있지는 않다. 하지만 세상에 대한 이해를 다각도로 넓히고 다양한 아이디어, 상상력을 구체화해 순수소설이 대부분을 차지하는 한국문학의 토양을 비옥하게 만들고 있다”고 말한다. 문학평론가이자 영화평론가인 강유정은 “장르영화는 그 안에서 즐길 수 있는 특정한 코드가 있다”며 “특정 문화에 대해 지식이 깊지 않고 감식안이 없더라도 코드를 이해하는 데 큰 어려움이 없어 대중성이 강하다”고 그 잠재력을 평한다. ‘판타스틱‘의 최내현 발행인은 “대중문화가 빈약했던 한국에서 이제야 장르가 제자리를 찾아가는 과정”이라고 최근의 상황을 설명한다. 하지만 장르가 자기 스스로 자리를 잡은 것은 아닐 터. 그렇다면 대중문화의 다양성을 가능하게 한 장르의 힘은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


취향은 나의 힘

장르가 각광받는 이유에 대해 심리학자 장근영은 “문화소비자들의 취향이 다양해진 탓”이라고 지적한다. 한국의 문화소비 방식은 2000년을 전후해 급격한 패턴변화를 보였다. 다수가 공감하는 거대담론이 문화의 중심에 있었던 과거 트렌드를, 관심사를 공유하는 소수끼리 뭉치는 문화가 대체한 것이다. “경직된 사고가 지배하던 과거에는 문화가 유입되는 창구가 일원화에 가까웠다. 시대가 바뀌고 인터넷, TV 채널 증가 등 외부에서 들어오는 문화창구가 다원화되면서 선택할 수 있는 옵션이 늘었다”는 장근영의 설명은 이를 뒷받침한다.

취향의 다양화를 감지할 수 있는 움직임은 곳곳에서 포착된다. 예컨대, 인터넷을 통해 취미를 공유할 수 있게 되자 동호회가 봇물처럼 쏫아져 나왔다거나 소수의 취향을 겨냥한 상품판매가 전례 없이 호황을 누리는 것은 좋은 예다. 불륜과 삼각관계를 양산하는 한국 드라마에서 전문화, 세분화된 장르물인 ‘미드’와 ‘일드’로 시야를 넓힌 것도 취향의 다양화를 증명한다. 주류를 장악하던 문화 헤게모니가 무너지자 그 빈자리를 채울 대안이 ‘장르’라는 키워드로 떠오르게 된 것이다.

“다양한 문화를 소비할 만큼의 경제적인 여유가 생겼다”는 대중문화평론가 이영재의 지적도 귀담아 들을 만하다. “경제적으로 풍족해져 개인주의가 강화됐고 남에게 구애받지 않는 활발한 소비활동을 통해 마니아문화가 늘면서 다양성에 일조했다”는 것이 그의 견해다. 대중문화를 산업과 떼어놓을 수 없는 요즘 문화시장은 소비자가 원하는 다양한 상품을 궁리하지 않을 수 없다. 시장성과 부합하는 상품은 시대가 요구하는 특성, 즉 유행에 맞춰 소비되고 이 단계를 넘어서면 하나의 ‘문화’로 생성된다.

소수의 문화가 늘어나는 건 장르가 다양해지는 기본 조건이다. 영화와 문학에서도 다양성의 징후가 뚜렷이 보인다. 차이가 있다면 새로운 것을 발굴하기보다 기존의 것으로 새로움을 추구한다는 것. 영화평론가 이상용은 “한국은 ‘다른 것’을 선호하는 문화풍토가 강하다. 원형적인 장르를 고집하는 건 한국의 패턴과 맞지 않다”고 전제하면서 “다국적인 문화가 급속도로 유입되는 상황에서 한국적인 코드와 접목, <괴물> <놈놈놈>처럼 장르 변형을 꾀하는 건 대중성의 다양화를 불러온다는 점에서 긍정적”이라고 평가한다.

문학의 사정도 다르지 않다. 이지연 편집주간은 “순수문학이 강세를 보이는 한국에서 독자들은 교양을 넓히기 위해 소설을 읽는다. 역사추리소설이 잘 팔리는 것도 교양코드와 맞기 때문이다. 다행히 장르문학이 순수문학에 영향을 미치면서 추리소설과 일본문학처럼 다양한 장르가 들어왔다”고 말한다. 결국, 사람들의 관심사가 전에 없이 넓어지다 보니 장르의 외연이 넓어지고 장르가 힘을 받고 있는 것이다.


좋은 이야기에 대한 갈망

장르가 부상하는 또 다른 이유는 ‘이야기에 대한 갈망’ 때문이다. 영화와 문학 모두 서사에 기반을 둔 예술이므로 늘 좋은 이야기에 목마르다. 장르는 검증된 서사구조가 있고 이 구조에 맞춰 이야기를 짤 수 있다. 더구나 나름의 서사규칙을 가지고 있어 그걸 적용하거나 배반하면서 재미를 얻는다. 한국의 경우, 장르문화가 크게 주목받은 사례가 별로 없었던 까닭에 이를 잘 활용하면 좋은 평가를 받을 가능성이 크다.

이 같은 상황에서 영화와 문학이 맺고 있는 특별한 관계는 흥미롭다. 장르에 대한 한국영화의 구애는 한국영화의 위기, 즉 이야기 부재를 뼈저리게 절감한 시기와 겹친다. 위기의식이 공감을 얻은 올해 <극락도 살인사건>의 김한민, <기담>의 정가형제, <궁녀>의 김미정 등 좋은 평가를 받은 신인 감독들이 장르영화를 택했다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문제는 능란하게 장르를 요리하는 훈련된 이야기꾼을 찾기 힘들다는 사실.

이런 난관에 봉착해 충무로가 주목한 것이 장르문학이다. 장르문학은 검증된 이야기가 많을 뿐더러 한국은 물론, 폭발적인 관심을 모으고 있는 일본문학까지 범위를 넓힐 수 있어 이야깃감의 보물창고라 해도 틀리지 않다. 충무로가 보내는 관심은 출판시장에서도 반갑다. 시장의 크기가 작은 출판계에서 판권 판매수입은 적지 않은 수익이다. 광고효과는 물론 새로운 독자층 형성과 다양한 장르문학 출시에도 큰 영향을 미친다. 즉 영화와 문학은 서로의 단점을 보완할 윈윈 파트너로 손잡을 여지가 충분하다.

이에 대해 이지연 편집주간은 “영화와 문학은 관계 특성상 시장요소가 함께 움직이는 경우가 잦다. 장르문학을 원작으로 한 영화의 인기는 장르문학 발전에 기여한다”고 말한다. 실제로, 세계적인 장르소설을 엄선한 황금가지의 ‘밀리언셀러 클럽’은 기획단계에 추리, 공포와 함께 SF, 판타지 등이 포함돼 있었다. 그러나 장르문화가 변변치 못한 한국에서 관심을 유도하려다 보니 추리, 공포소설 같은 영화 원작이 주로 선정돼 인기를 끌었다. 이에 힘입어 밀리언셀러 클럽 한국편도 생겼고 지금껏 출간된 7편 중 6편이 영화와 드라마 판권으로 팔린 상태다. ‘판타스틱’의 최내현 발행인은 “문화산업이 번창하려면 뒷받침하는 문학이 있어야 한다. 한국영화가 번창한다지만 받쳐줄 국내 문학이 드물어 이를 해결해보자는 생각에 ‘판타스틱’을 창간했다”고 밝혔다.

문화상품의 최종 기착지는 재미다. 장르가 추구하는 것도 재미다. 문화소비자들이 재미를 느끼는 가장 큰 원천은 ‘이야기’다. 영화와 문학은 사이좋게 이야기를 공유한다. 그런 이유로 이야기의 위기는 영화와 문학의 위기를 말한다. 장르 붐의 이면에는 좋은 이야기를 발굴하고 그것을 즐기려는 창작자와 대중의 열망이 반영돼 있다.


장르, 대중이 원한다

장르가 한국 대중문화의 토양 위에 정착하기 위해서는 아직도 갈 길이 멀다. 시장이 작다는 태생적인 한계는 장르문화 발전에 가장 큰 장애물이다. 한국에서 특정 문화가 뿌리내리는 과정은 미국이나 일본처럼 문화시장의 파이가 큰 나라에 비해 험난하다. 한국은 사람 사이에 영향을 받는 문화가 강해 짧은 시간 동안 폭발적으로 붐을 이루다가 금세 누그러지는 경향이 짙다. 한 번 기세가 꺾이면 소수의 문화로 남아 명맥을 유지한다. 그 결과 한국 대중문화의 다양성은 동시대적이라기보다 통시적일 정도로 무의미한 목록만 늘어나는 경향을 보인다.

이를 시장의 규모와 환경의 탓으로만 돌릴 수는 없다. 오히려 대중문화, 특히 장르문화에서 발견되는 문제점들을 찾아 한국적인 상황에 맞춰 수정을 가하고 변화를 주는 것이 더 현명한 대처법이라는 지적들이 높은 것. 예컨대, 한국 장르문화에서 SF는 추리, 공포, 판타지와 달리 안타깝다 싶을 만큼 외면 받고 있다. 영화평론가 강유정은 “한국의 문화수용자들은 ‘현실성’에 길들여져 있다. 현실성이 없는 것에 대해 상상력을 즐기기보다 삐딱하게 바라보는 시선이 있다”고 진단한다. 영화와 문학은 이를 해결하기 위해 부단한 시도를 보여 왔다. 여전히 시장의 반응은 냉담하지만 이를 타개할 방법은 분명 존재한다. 장르 전문가들이 입을 모으는 것은 영화에서는 논리적 이야기와 세련된 비주얼 접근, 문학에서는 SF 시즌을 몰고 올 스타작가의 출현이다. 물론 하루아침에 이룰 수 있는 목표가 아니다. 지금까지의 시행착오만큼, 그 이상의 시련을 거듭해야 할지도 모른다. 다만 실패한 시도들이 그저 무의미하지만은 않다는 사실이다. 그런 접근들은 또 다른 문화가 자라날 토양이 되기도 한다.

대중문화 지형에서 장르의 융기는 갑작스러운 현상이 아니다. 다양한 문화적 실험이 대중문화라는 변화무쌍한 자장 안에 쌓이는 과정에서 장르는 제자리를 찾아가고 있다. 장르 붐이 반가운 것은 다원화된 사회를 반영하듯 취향과 다양성이 존중받는 문화가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장르는 새로운 문화를 갈구하는 대중들의 마른 가슴에 불을 지피는 불씨다. 장르를 불러낸 것은 영화제작자도 출판기획자도 아닌 우리 시대의 문화소비자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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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름2.0 362호
(2007. 11. 27)
2007/12/10 15:47 2007/12/10 15: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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