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리소설에 입문하게 된 계기는 셜록 홈즈였지만 그보다 더 넓고 광활한 미스터리소설의 세계로 눈을 뜨게 해준 것은 <황금가지>의 ‘밀리언셀러클럽’이었다.
흔히 밀리언셀러클럽의 추종자들은 ‘밀클’이라고 줄여서 말하곤 하는데 나는 밀클의 책을 2006년 1월 6일 교보문고에서 처음 구입했다. 짧고 강렬한 제목에 끌려 미키 스필레인의 <내가 심판한다>를 구입한 후 <내 총이 빠르다>와 <복수는 나의 것>은 물론이요, (근데 새로운 ‘마이크 해머 시리즈’는 언제 출간되나요?) 이후 한국 편까지 포함해 지금까지 총 54권의 밀클 소설을 모았다. 지금도 내 책상에는 며칠 전 구입한 스티븐 킹의 <다크 타워> 시리즈 세 권이 가지런히 놓여있을 뿐 아니라 곧 출간될 스티븐 킹의 단편집은 구입 목록 0순위에 올라있다.
이 정도 가지고는 밀클 추종자라고 하기엔 못 미덥다고? 그럼 이건 어떤가. 현재 읽고 있는 책은 데니스 루헤인의 <전쟁 전 한 잔>이며 번역가 조영학 선생님과는 언제 한 번 꼭 만나서 ‘사립탐정 켄지&제나로 시리즈’를 두고 밤 새워 이야기 하고픈 소망이 있다. 안 그래도, 얼마 전까지 몸 담았던 모 영화주간지에서는 그에게 데니스 루헤인 관련한 글을 청탁한 적까지 있다. 이제 인정?
얼마 전 평소 즐겨찾기 해두고 매일같이 드나들던 밀리언셀러 클럽 카페를 살피던 중 밀클 100권 기념 카탈로그에 들어갈 글을 모집한다는 게시물을 접했다. 보는 순간 내가 빠져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더라. 아, 글쎄 내가 밀클 추종자래도. 게다가 개인적으로도 50권 넘게 소장하고 있는 마당에 카탈로그 핑계로(?) 중간집계 비스무리하게 정리하고픈 마음도 굴뚝같았다. 그래서 결정했다. ‘나만의 밀클 소설 베스트 10’
내가 가지고 있는 54권의 밀클 소설 중 개인적으로 가장 기억에 남는 책 10권을 지극히 사적이고 편향적이고 주관적이고 노골적으로 선정했다. 선정되지 않은 책은 운 나쁘게도 나의 취향에 살짝 못 미쳤거나 미처 구입을 못한 것이니 그렇게 기분 나빠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모두 걸작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으니까.
아무튼, 그래서, 결론은 버킹검. 밀클 100권 출간을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
10위 <나의 식인 룸메이트> 이종호 외 9인
한국에서 장르소설을 쓴다는 것은 독자들의 무관심을 향한 외로운 투쟁이었다. 2006년 <한국 공포 문학 단편선>이 나온 이후 외로운 투쟁이 결코 계란으로 바위 치는 격이 아니라는 게 증명됐다. <한국 공포 문학 단편선>의 세 번째 시리즈인 <나의 식인 룸메이트>는 전통은 미천할지언정 한국 공포문학의 수준이 높다는 결정적인 증거다. <노랗게 물든 기억>처럼 전통적인 공포물부터 동물좀비를 등장시킨 <붉은 비>와 자연재해물의 성격을 지닌 <얼음폭풍>까지, 폭넓은 소재와 탄탄한 구성을 자랑한다. 이에 더해, 첫 번째 시리즈에서 만났던 작가들의 성장과정을 지켜보는 것은 또 하나의 재미다. <한국 공포 문학 단편선> 시리즈는 그 자체로 한국 공포문학의 역사이자 전통인 것이다.
9위 <13계단> 다카노 가즈아키 | 전새롬 옮김소설의 몰입도를 속도계로 잴 수 있다면 <13계단>은 그야말로 매그넘 38구경에서 발사된 총알 위에 올라탄 것과 진배없다. 그게 다가 아니다. 오락적으로 뛰어난 작품일 뿐 아니라 일본의 현재 사형제도에 비판을 제기하는 작품이란 점에서 문제작이며 무엇보다 데뷔작이란 사실이 충격적으로 다가온다. 최근 장르소설은 재미에 더해 의미까지 생각하는 경향을 보이는데 <13계단>이 바로 그런 작품이다. 미야베 미유키의 해설이 첨부돼있어 더욱 각별하게 느껴지는 책인데 에도가와 란포상 심사위원으로 참석했던 그녀의 말을 빌리자면, <13계단>은 논쟁 없이 수상작에 선정된 발군의 작품이란다.
8위 <블랙 달리아> 제임스 엘로이 | 이종인 옮김
제임스 엘로이가 열 살 때 그의 어머니는 의문의 죽음을 당했다. 그에게 어머니의 죽음은 평생을 따라다닌 상처였다. 그런 기억을 품은 채 엘로이는 또 하나의 죽음에 사로 잡혔다. 입 양쪽이 찢어진 채 죽어 웃는 시체로 불린 ‘블랙 달리아’ 사건이었다. 그는 어머니와 블랙 달리아를 동일시했다. 그렇게 나온 것이 바로 <블랙 달리아>다. 제임스 엘로이는 서문에 이렇게 쓰여 있다고 한다. “블랙 달리아는 유령이다. 우리의 두려움과 욕망을 기입하는 빈 페이지다.” 그래서일까, <블랙 달리아>가 마지막에 도달한 지점은 그 무엇도 명쾌히 해결되지 않는 지독한 무력감의 세계다. <블랙 달리아>를 읽은 지 3년이 됐지만 소설에 대한 인상은 유령처럼 잔상에 남아있다. 어머니의 죽음을 접하고 평생 그 기억을 떨치지 못한 제임스 엘로이처럼.
7위 <가라, 아이야, 가라> 데니스 루헤인 | 조영학 옮김
닉 혼비는 저서 <닉 혼비 런던스타일 책읽기>에서 <비를 바라는 기도>를 두고 “반복해서 등장하는 주인공이 왜 매력적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며 ”<미스틱 리버>야말로 데니스 루헤인 최고의 작품“이라고 말한다. <미스틱 리버>가 걸작인 건 사실이지만 혼비의 말에는 동의하지 못하겠다. 루헤인 최고 작품은 켄지&제나로 시리즈니까. 처음부터 읽어본 사람이라면 다 안다. 권을 더할수록 미묘하게 변화해가는 켄지와 제나로 사이의 감정이 이 시리즈의 백미라는 것을. 거기에는 수십 년 넘게 보스턴에서 지내오면서 뼛속깊이 각인된 지역 정서가 이들의 사랑에 미친 영향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고작 <비를 바라는 기도> 한권 읽고 시리즈를 평가하는 편협함이라니. 나는 닉 혼비의 <하이 피델리티>를 사랑하지만 켄지&제나로 시리즈에 비하면 63빌딩이 부럽지 않을 만큼 저 아래 순위다.
6위 <800만 가지 죽는 방법> 로렌스 블록 | 김미옥 옮김
요즘엔 탐정이 전지전능한 신처럼 굴면 독자들이 좋아하지 않는다. 한두 가지 정도 결점을 가지고 있어야 인간적인 매력을 느낀다. 매튜 스커더는 이 분야의 최고봉이라 할만하다. <800만 가지 죽는 방법>은 단순히 매튜가 연쇄살인범을 잡는 이야기가 아니다. 뉴욕 경찰관 시절, 강도를 쏜다는 게 잘못 아이를 쏘아 실직하고 이혼 당한 그가 술에 절어 살다 살인범을 처치한 후 간신히 금주하는 이야기다. 그 과정이 얼마나 드라마틱한지, 매튜가 금주(禁酒) 모임에서 알코올 중독자임을 인정하며 눈물을 흘리는 마지막 장면에서는 술 한 모금 입에 대지도 못하는 내가 다 술 생각이 간절할 정도다. 추리소설을 읽으면서 눈물을 흘리는 흔치 않은 경험, <800만 가지 죽는 방법>이 바로 그런 소설이다.
5위 <세계 대전 Z> 맥스 브룩스 | 박산호 옮김
<세계 대전 Z>는 전혀 새로운 방식으로 좀비를 이야기하는 작품이란 점에서 좀비물의 한 획을 그은 작품이라 할만하다. 이 소설은 좀비의 발생부터 전염, 그리고 재건까지가 전통적인 서사 방식이 아닌 인터뷰 형식으로 구성된 것이 특징이다. 영화로 치자면 다큐멘터리라고 할까. 그래서 <세계 대전 Z>는 이 책을 읽고 있는 이 시간 밖에서 좀비들이 활동하고 있을 것만 같은 불안한 현실감이 넘쳐난다. 난 이 작품이 작금의 돼지독감과 같은 전염을 일찍이 예감한 작품이란 점에서 징후적이라고 생각한다. 안 그래도 이를 직감한 할리우드는 <퀀텀 오브 솔러스>의 마크 포스터 감독을 기용해 영화화 중에 있다. 제작자로 참여한 브래드 피트가 출연할 가능성이 높다고. 2010년 개봉 예정이란다.
4위 <스탠드> 스티븐 킹 | 조재형 옮김
지구 종말 이야기를 좋아한다. 많은 대가들이 지구 종말에 관한 이야기를 썼지만 그중에서 가장 인상에 남는 작품은 스티븐 킹의 <스탠드>다. 킹은 <스탠드> 외에도 <미스트> <셀> 등 적지 않은 수의 지구 종말 소설을 집필했다. 그중 <스탠드>를 최고의 작품으로 치는 건 바로 ‘현실성’ 때문이다. 돼지 독감이 창궐하고 있는 작금에 <스탠드>를 생각하면 얼마나 획기적인 작품이었는지 놀라울 정도다. 이미 킹은 1978년 변종독감바이러스를 통해 불과 일주일도 안 돼 전 세계가 멸망하는 과정을 사실적으로 그려낸 바 있다. 현실성은 결국 실현 가능성 여부. 가능성이 높을수록 그에 비례해 감정이입도 높아지기 마련인데 <스탠드>는 그래서 내게는 가장 무서운 작품으로도 기억된다.
3위 <나는 전설이다> 리처드 매드슨 | 조영학 옮김
스티븐 킹은 리처드 매드슨에게 <셀>을 바쳤다. 조지 로메로 감독은 리처드 매드슨의 작품을 읽고 영화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을 만들 수 있었다. 그처럼 <나는 전설이다>는 전설이다. <나는 전설이다>는 현대 좀비물의 원형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리처드 매드슨이 선보인 ‘멸망한 지구에서 홀로 살아남은 인간’이란 설정은 이후 수많은 창작자들이 인용하고 모방하고 표절할 정도였다. <나는 전설이다>를 원작 삼은 영화도 <지상 최후의 사나이>(1964) <오메가맨>(1971) <나는 전설이다>(2007)까지 모두 세 차례 만들어졌다. 하지만 눈이 벌개질 정도로 형편없었다. 나는 이 영화들을 보기 전에 소설을 읽었다.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영화를 먼저 봤다면 절대 소설을 읽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2위 <내가 심판한다> 미키 스필레인 | 박선주 옮김 마이크 해머에게는 나름의 확고한 도덕률이 있다. “내가 한 약속은 범인의 배에 총알을 박아 주겠다는 것이었다.” 교과서적인 도덕은 안녕, 악인은 내가 심판한다. 해머는 도덕을 총알삼아 45구경 권총을 무장하고 악인을 겨눈다. 악인은 ‘죽어도 싼 인물’이다. 그는 미국 문화 최초의 안티 히어로였던 셈이다. 그러니까 <더티 해리>의 해리 칼라한도, <프렌치 커넥션>의 도일도 모두 마이크 해머가 직계 선배인 것이다. 그래서 마이크 해머 시리즈는 사무실로 찾아온 의뢰인이 아니라 친구의 살해로부터 사건이 시작한다. 나 같은 도덕군자(?)가 전혀 상상할 수 없는 방식의 수사는, 아니 복수는 그래서 모골이 송연한 카타르시스를 선사한다. 마이크 해머는 내가 가장 사랑하는 탐정이다.
1위 <아웃> 기리노 나쓰오 | 김수현 옮김
밀클 중에서 딱 한권만 골라야 한다면 난 주저 없이 기리노 나쓰오의 <아웃>을 선택할 것이다. 그만큼 <아웃>이 내게 준 인상은 강렬 그 자체였다. 하층계급의 여성을 앞세워 사회악과 정면에서 맞서는 기리노 나쓰오의 파워 넘치는 필력은 <아웃>을 만나기 전까지 이 분야의 소설에서 접하지 못했던 그런 성질의 것이었다. 특히 마사코가 자신을 죽이려는 사다케와의 마지막 대결에서 가장 처절한 폭력의 순간에 예상치 못했던 섹스를 통해 피로 얼룩진 자유를 보장받는 순간의 그로테스크함이란. 현대사회에서 하층계급이 처한 보잘것없는 삶의 증거를 이렇게 처절하게 묘사한 작품이 있었던가. 나는 감히 <아웃>을 일러 미스터리소설계의 <죄와 벌>이라고 주장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