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의 새 똥꼬가 찬란히 밝아왔다. 이맘때가 되면 주제가 뭐가 됐든 ‘베스트 10’ 같은 줄서기로 깔끔히 정리를 해줘야 지난 1년을 나름 의미 있게 산 거 같은 생각이 든다. 그래서 준비했다. 2008년 한 해 내가 읽은 장르소설 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10권의 책. 제목하야, ‘나뭉이의 지극히 사적이고 편향적이고 주관적이고 노골적인 2008 장르소설 베스트 10’
10. <셜록 홈즈 마지막 날들> 미치 컬린 | 황금가지
셜록 홈스가 부활했다. 근데 93세의 나이로 다시 태어났다. 무슨 소리냐고. 셜록 홈스 소설에 깊이 감명받았던 코난 도일의 후예들이 홈스를 주인공으로 그들 각자의 소설을 내기 시작했다. 그중 <타이드랜드>로 유명한 미치 컬린의 <셜록 홈즈 마지막 날들>은 노년의 홈스 삶을 조명한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과거의 영광을 재현하기엔 이미 늦어버린 나이, 홈스는 현재의 사건을 수사하는 대신 잃어버렸던 과거의 자신을 추리한다. 서섹스에서 양봉업을 하는 노년의 홈스와 한창 전성기를 구가하던 시절의 홈스 이야기가 교차로 서술되는 가운데 <셜록 홈즈 마지막 날들>은 회한의 감정과 찬란했던 영광의 시절이 벌집처럼 어우러져 묘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9. <손톱> 김종일 | 랜덤하우스코리아
소설의 몰입도를 속도계로 잴 수 있다면 <손톱>은 그야말로 남자 테니스 선수의 서브 속도에 버금갈 정도다. 이종호와 함께 공포소설계의 양대 산맥을 형성… 하고 있다고 곧잘 오해받곤(?) 하는데 난 <손톱>을 읽으면서 단순히 공포라는 생각이 들지 않더라. 악몽을 꿀 때마다 손톱이 하나 둘 빠지면서 그 사연을 추리하러 나서는 주인공 홍지인의 궤적을 쫓다 보면 <손톱>이 스릴러 혹은 미스터리와 맞닿아 있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최근 장르소설은 한 장르에만 집착하지 않는 경향을 보인다. 조 힐의 <하트모양상자> 역시 미스터리의 요소가 가미된 오락적 공포소설, 즉 ‘공포테인먼트’의 모범 예였다. <손톱>이 그렇다. 그래서 나는 감히 김종일의 <손톱>을 조 힐의 작품에 견준다.
8. <다이디타운> F. 폴 윌슨 | 북스피어
레이먼드 챈들러가 Sci-Fi소설을 썼다면? 농담이다. <다이디타운>은 <블레이드 러너>의 세계에서 코트 깃을 여미고 있는 필립 말로우 얘기다. 시대는 가까운 미래, 오래되고 지저분한 LA의 추레한 뒷골목을 연상시키는 ‘다이디타운’에서 활동하는 사립탐정 드레이어는 필립 말로우의 미래 버전이다. 지저분한 사건에 끼어들기 싫다며 비아냥대는 폼이나 자존심을 한껏 세운 뒤 슬쩍 독백 삼아 ‘돈이 절실하게 필요했다’며 못 이기는 척 사건을 맡는 그의 태도는 귀여운 마초 필립 말로우의 전형이다. 하지만 이 소설의 주인공은 드레이어다. 암울한 미래의 사회상이 제시되는 가운데 인간도 아닌 클론, 그것도 창녀의 의뢰를 받아 무사히 일을 마친 후 그녀와 재회하는 결말부는 예기치 않은 감동에 눈물이 날 지경이다. 필름누아르의 세계에 한줄기 서광이 비춘다면 이런 광경일까. 다른 건 몰라도 드레이어는 필립 말로우보다 심장이 더욱 뜨거운 탐정인 것만은 분명하다.
7. <귀신전> 이종호 | 랜덤하우스코리아
<귀신전>은 <손톱>처럼 ‘공포테인먼트’ 소설이다. 근데 작가는 이종호다. 그가 공포테인먼트 소설을 썼다고 하니 과연 무슨 얘기일까. 퇴마사가 귀신 잡는 이야기다. (<고스트 버스터즈>?) 저승과 이승의 경계가 파괴된 ‘귀사리’(鬼思里)가 배경이다. (<중천>?) 귀사리를 통해 세상에 나온 귀신과 맞서는 퇴마사들은 귀신을 보는 무시무시한 능력을 가졌다 하여 주변과 어울리지 못한다. (<엑스맨>?) 그런 주인공들이 귀신을 무자비하게 처치할 리 없다. 이들의 한(恨)을 풀어줘 편안하게 저승으로 보내는 것이 이들의 임무. (<고스트 위스퍼러>?) 과연 공포테인먼트라니, 괄호 안 얘기는 표절했다는 게 아니라 그만큼 오락적 요소가 다분하다는 의미다. 하지만 <귀신전>의 진가는 공포의 성격에 있다. <귀신전>에 등장하는 귀신들은 오싹함에 오줌 찔끔거리기보다는 귀신이 될 수밖에 없었던 가슴 아픈 사연에 눈물 먼저 찔끔거리니. <귀신전>에 묻어나는 ‘따뜻한’ 공포야말로 이 소설의 정수다
6. <듀마 키> 스티븐 킹 | 황금가지
<셀>이나 <리시 이야기>는 분명 재미있었지만 한편으론 현실성을 많이 배제한 까닭에 스티븐 킹의 이름값에 살짝 걸치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올 초에 만난 미야베 미유키는 이를 두고 교통사고 후 킹이 예전만 못해졌다고 실망감을 드러냈더랬다. <듀마 키>는 그런 미미 여사의 실망감을 말끔히 씻어낼 수 있을 만큼 스티븐 킹 작품의 정수가 담겨 있다. 사고로 팔을 잃은 사업가 에드가가 화가로서의 재능을 발굴하고 이를 통해 듀마 키라는 섬에 깃든 저주를 푼다는 내용의 <듀마 키>는 스티븐 킹 자신이 당했던 교통사고로 인해 겪었던 후유증의 경험을 공포와 결합했다. 하여 초현실적인 이야기면서 작가의 경험담이 바탕이 된 까닭에 현실적인 기운이 짙게 배어 있어 초기 작품의 박력이 그대로 느껴진다. 가랑비에 옷 젖는 줄 모르듯 스멀스멀 등을 타고 기어오르는 공포가 압권.
5. <연기로 그린 초상> 빌 S. 밸린저 | 북스피어
빌 S. 밸린저의 공인된 최고작은 <이와 손톱> <기나긴 순간>이지만 내게 최고작은 <연기로 그린 초상>이다. 이 소설은 수금대금업자 대니 에이프릴이 어린 시절 매혹됐던 여자를 아무런 단서 없이, 고작 신문에 실린 단신 기사만 가지고 추적한다는 내용이다. 하나 둘 조금씩 그녀의 정체를 알아가는 과정에서 대니가 반한 여자는 상상 속에서만 그려지는데 이는 오토 프레밍거 감독의 <로라>(1944)를 연상시킨다. <로라> 역시 초상화 속 여자에 매혹된 경찰이 수사를 빌미 삼아 그녀를 찾아간다는 내용으로 주인공의 심리가 미스터리하게 펼쳐진다. 다만 <연기로 그린 초상>이 미스터리를 자아내는 방식은 <로라>와는 확연히 다른데 대니와 여자의 시점이 교차로 서술된다는 점이다. 이와 같은 교차서술은 밸린저만의 전매특허로,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의문과 해결을 거의 동시에 이루는 구성은 성미 급한 지금의 독자마저 매혹시킬 만큼 시대를 앞서 간 것이었다. 대니가 마침내 만나게 되는 그녀에 대한 환상은 제목처럼 짧은 순간에 사라지는 연기와 같은 것이지만 밸린저의 소설이 주는 감흥만큼은 50년이 지난 지금도 자욱하다.
4. <혼조 후카가와의 기이한 이야기> <괴이> 미야베 미유키 | 북스피어
미미 여사의 작품은 모두 재밌다. 그래서 좀 질렸다. 에도시대를 배경으로 한 시대극 <외딴집>을 보고 놀란 건 그래서다. 이전까지 모두 현대가 배경인 미스터리를 읽으면서 미미 여사에게 뭔가 새로움을 갈구했던 모양인데 <외딴집>이 갈증을 풀어줬던 것이다. 한편으론 100퍼센트 해갈되지 못한 것이 <외딴집>이 보여주고 있는 현대성 때문이었다. 미미 여사 작품에 등장하는 범죄는 모두 개인이 아니라 사회가 공모한다. 현대 범죄라는 것이 그렇다. 그런 점에서 <외딴집>은 배경을 현대로 돌려도 무방한 이야기였다. 그러나 <혼조 후카가와의 기이한 이야기>와 <괴이>는 달랐다. <외딴집>처럼 에도물이었지만 지극히 개인적인 이야기였고 미스터리 혹은 추리라기보다는 공포, 즉 무서운 이야기에 가까웠다. 기존 미미 여사의 작품과는 확연히 다른 종류의 것이었으니 나로선 이보다 더 좋을 순 없었다. 단 하나, 변하지 않는 것이 있었으니 인간을 먼저 생각하는 미미 여사 특유의 따뜻함은 무서운 이야기라고 해서 사라지는 법이 없더라.
3. <로드> 코맥 매카시 | 문학동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를 읽을 때만 해도 장르를 제대로 비틀 줄 아는 기교 있는 작가라고만 생각했다. 생각이 짧았다. <로드>를 읽고는 코맥 매카시가 위대한 작가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코맥 매카시에게는 장르가 기교도 허구도 아닌 현실이고 세계다. 그것도 희망이 없는 세계다. 그의 소설은 항상 이를 전제로 시작한다. 그래서 코맥 매카시의 작품은 곧 무에서 유를 창조해가는 과정이다. 세상의 현재형은 지옥이라는 것을, 그렇다면 그 이후의 세상을 얘기하겠다는 것이 코맥 매카시의 태도다. 그것은 곧 절망뿐인 세상에서 희망의 파편만이라도 발견하려는 작가의 절박함이자 초연함이다. 고요하지만 파괴적이고 절망적이지만 아름다워서 삶은 살 만한 가치가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로드>는 그런 코맥 매카시의 세계관이 가장 극적으로 발현된 작품이다.
2. <유니버설 횡메르카토르 지도의 독백> 히라야마 유메아키 | 이미지박스
우리 사람이 못 되도 괴물은 되지 말자? 내가 히라야마 유메아키라면 사람이 못 되는 한이 있더라도 반드시 괴물이 되고 싶다. 히라야마 유메아키는 상상력의 괴물이다. 단편 8편이 수록된 이 책의 각각의 제목만 보더라도 감히 범접하기 힘든 ‘포스’가 느껴진다. 예컨대, ‘유니버설 횡메르카토로 지도의 독백’에서 어디 지도가 범인 잡는 이야기를 상상이나 할 수 있겠는가. 공포부터 Sci-Fi까지 온갖 장르를 횡단하는 히라야마 유메아키 월드는 종잡을 수 없는 이야기 구성이 인상적이지만 결국엔 인간의 절대 악을 결말로 삼는다는 점이 공포다. 더군다나 오싹해서 휘발성이 강한 공포가 아니라 읽은 후에도 끈적끈적 몸에 달라붙는 공포를 선사한다는 점에서 히라야마 유메아키의 책은 중독성이 강하다. 인간은 ‘악’을 통해 존재를 확인한다는, 감추고 싶지만 감춰지지 않는 진실을 폭로하는 말 그대로 문제작.
1. <그리고 밤은 되살아난다> 하라 료 | 비채
개인적으로 올해 가장 늦게 만난 작품이지만 올해 가장 최고로 꼽고 싶은 장르소설. 레이먼드 챈들러의 영향을 받았다고 고백한 작가는 폴 오스터부터 무라카미 하루키까지 수도 없다. 하라 료도 그중 한 사람이다. 하지만 하라 료만큼 레이먼드 챈들러의 비열한 세계를 충실하게 재현하면서 그 이상의 무엇을 보여주는 작가는 본 적 없다. <그리고 밤은 되살아난다>의 주인공 탐정 사와자키는 고독한 존재다. 웬만해선 도와주는 사람이 없다. 그래서 강하다. 강하지 않고서는 이 비열한 거리에서 살아갈 수가 없다. 그의 강함은 불의에 맞서는 정의라기보다는 자존심을 지키려는 최소한의 방어책이다. 한 발의 총알보다 뼈 있는 농담이 상대방에게 치명상을 입힌다는 사실을 사와자키는 본능적으로 알고 있다. 레이먼드 챈들러를 좋아한다면, 무엇보다 필립 말로우를 최고의 탐정 캐릭터로 꼽는다면 반드시 읽어봐야 할 책.